1. 왜 이제와서 <황해>를 다시 끄집어 내는가?

 


<추격자>로 박찬욱, 봉준호 감독의 뒤를 이을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나홍진 감독은 무려 백억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황해>를 만들었지만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스토리의 개연성 부족, 조선족과 중국인들의 비하, 폭력성등이 이 영화의 질주를 멈추게 만들었다. 예상외로 영화는 혹평을 받았고, 스크린을 일찍 닫아버려 관객 동원은 200만에서 300만선에서 끝났다. 인터넷에는 황해를 비판하는 글들, 특히 조선족과 중국인들에 대한 몰이해가 가져온 <황해>의 내용상에 오점들에 대해 비판하는 글들이 보였고, 그렇게 <황해>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잠수해버렸다. 마치 영화 마지막에 구남이의 신세같다.

그렇다면 왜 이제와서 수장되어버린 <황해>를 다시 끄집어 내야하는가? 표면적으로는 혹평의 주 원인이었던 조선족 비하, 폭력성, 부족한 스토리등이 있겠지만 대한민국에서 성공한 영화치고 모든 것들이 충족되어 성공한 사례는 별로 없었다. 우리가 열광해 마지 않던 <올드보이>에서도 도끼는 등장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전우치>의 스토리도 그다지 풍요롭지만은 않았다. 단지, 이 영화의 허점이라고 한다면 '조선족 비하' 정도 되겠다. 그러나 그 이유 하나로 이 영화가 씹히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다. <황해>는 근래 개봉한 영화중에 가장 '과소평가'를 받은 영화이다. 나는 이 영화가 이렇게 묻혀버리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다. 그래서 다시 끄집어 내기로 했다. <황해>는 다시 한 번 재평가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

2. 허기

 

 



< 언제나 배가고픈 구남. <황해>에서는 유독 배고픈 구남의 모습이 많이 나온다. 그는 어떤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나홍진 감독은 배고픈 구남이의 배를 채워주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황해>에서 음식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빚을 진 구남. 그는 한국에 도착해서 그의 굶주린 배를 거침없이 채운다. 이러한 구남이의 모습은 보는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유발시키지만 왜 구남이가 배가고픈지에 대해서는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장면을 두고 조선족들이 모두 굶고 산다는 식으로 묘사했다는 비난은 단순히 영화의 표면적인 의미만을 해석한 것이다. 구남이의 굶주림은 다른 곳에 존재한다.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간 아내. 그리고 간혹 구남이의 악몽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채 다른 남자와 살을 섞고 있는 아내에 대한 성욕과 집착, 그리고 생존의 집념이 곧 굶주림으로 표현된 것이다. 식욕의 해결은 곧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를, 이러한 생존의 집념은 서울에서 아내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이퀄관계에 놓여있다. 그가 아내를 찾고, 빚을 갚기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면정학이 구남이에게 처음으로 '제의'한 것은 다름아닌 '밥 먹자' 였다.


반면에 면정학이 뭔가를 먹는 장면은 단 한 장면만 나온다. 그가 해바라기 씨 같은 것을 씹는 것을 제외하고 뭔가를 본격적으로 먹는 것은 위에 나오는 족발을 먹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두 개의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로 포식자로서의 면정학이다. 그는 사냥꾼이다. 구남이를 잡기위해 한국에 왔고, <추격자>에서처럼 다른 누군가를 쫒아다니지만 <추격자>와는 달리 이번에는 그가 유리한 입장에 놓여있다. 컵라면이나 소시지, 감자, 밤으로 허기를 때우는 구남이와는 다르게, 그의 음식은 그 스케일부터 다르다. 커다란 통에, 족발을 담아 뜯어먹는 것이다. 음식을 먹고 담배를 피우는 구남이에게서 초조함이 느껴진다면, 족발을 다 뜯은 후에 담배를 피우는 면정학에게는 여유로움마저 느껴진다.

둘째로 영화의 진행상 이 족발이 꼭필요하기 때문이다. 족발은 영화상에서 중요한 무기로 등장하게 된다. 면정학이 생존의 기로에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무기는 바로 족발이었다. 족발이 무기로 이용된 것에는 포식자로서의 면정학에 대한 기질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자신이 뜯어먹은 족발의 뼈는, 곧 그가 '포식자'로서 살지 못했다면 살아남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면정학이 족발을 뜯지 않았다면, 그는 생존이 위협받는 그 상황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결국 뭔가를 죽이고, 그 죽인 것들에 의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면정학 본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소품이다.

3. <황해>에는 악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버스회사 사장인 김태원.
그는 이 영화에서 면정학과 더불어 구남을 쫒는 '악당'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를 과연 악당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는 바로 '김태원의 등장'에서 시작된다.
 
이 영화는 상당히 복잡한 구성으로 짜여져 있지만 모든 사건의 시작은 '김승현 교수'와 '김태원의 내연녀' 의 관계를 질투하는 '김태원'과 김승현 교수의 아내와 내연관계인 '김정환'이 '김승현 교수'를 죽이려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김승현 교수의 아내와 내연관계에 있는 '김정환'은 극중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주로 등장하는 것은 '김태원'. <황해>에서 김태원은 이른바 '악당' 역할로 나온다. 그런데 그는 다른 '악당'들과는 좀 다르다. 보통 악당들은 극의 초중반까지는 자신의 의도대로 일을 진행시키는데 김태원은 그렇지 못하다. '최이사'에게 구남이를 잡으라고 시키지만 변변찮은 '최이사'는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김태원은 '최이사'에게 면정학도 잡아오라고 시키지만 그 또한 실패하고, 오히려 면정학에게 약점을 잡혀 거래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김태원에게는 자신의 내연녀에 대한 질투와,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싶은 두 개의 욕망에 시달리게 되는데, 김태원은 이 둘을 모두 잃을 위기에 처해져 있는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한국사람'. 그는 사실 이 사회계층에서 최상위 계층은 아닐지라도 어느정도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어느 날 부터인가 그의 일들은 꼬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이렇게 꼬이는 일들을 해결하고자 하지만 그 또한 실패하고 만다.
김태원은 사실 구남이나 면정학보다 더 처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자신이 벌인 일들이 만천하에 알려질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절대로 악당의 모습이라 볼 수 없다. 김태원 또한 '생존'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죽으면서까지 김승현이 자신의 여자와 불륜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뇌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처절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김태원의 모습은, 그 종류는 다를지언정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대변한다. 굳이 불륜이 아닐지라도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하는, 그런데 되는 일은 없는 현대 중상류층의 모습을 김태원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면정학은 과연 악당인가? 그는 이익을 차리기 위해 김태원과 '딜'을 하지만, 그 역시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구남이를 잡았어야 하는 입장에서 잡지 못한 면정학은 김태원에게 자신이 사라지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악당은 사라지지 않는다. 악당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사라지겠다'는 대사를 내뱉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면정학은 사라지고 싶어한다. 돈을 벌기위해 한국에 왔지만, 그리고 기어이 돈을 벌어야만 하지만 끝내 그는 돈을 벌지 못한다. 여기서 면정학과 김태원의 공통점이 등장한다. 바로 '욕심'이다. 더 많은 돈을 받아 내고자 하는 면정학. 그리고 자신의 여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김태원에게서 우리는 '조금 더'를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4. 이 영화는 정말 조선족을 비하하는 내용일까

어느 웹사이트에서 <황해>를 비난하는 글 중에 조선족이 너무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그렸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조선족이 그렇게 살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구남이의 집은 그렇게 누추해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거실에 소파도 있고 우리나라의 하층민들 보다는 나은 살림살이다. 다만, 집을 나간 아내 때문에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한 구남이의 모습과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집기들 때문에 집 안은 황폐해 보인다.
구남이는 빚을 지고 있으며, 그 빚을 갚기 위해 살인자가 된다. 그리고 그 일을 조선족에게 시킨다는 설정이 조선족을 비하시킨다기에는 다소 억지가 있다.

이 영화에서 의문이 있다면 왜 조선족이 주인공인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나홍진 감독은 우리나라에서 천대받고 살고 있는 조선족의 '또 다른 이면'을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메이드 인 차이나가 많은 것은 '인건비'가 싸서...혹은 중국산은 품질이 좋지 않다, 는 말들은 중국을 비하시키는 말들이 아닌가? 식당에서 조선족들을 종업원으로 쓰는 것은 현실이 아닌 상상속의 이야기인가? 왜 식당에서는 조선족들을 고용하는가? 

인건비가 싸니까.

이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현실이다. 종업원으로 고용되건, 살인자로 고용이 되건 어쨌든 '조선족은 저렴하다'라는, 이미 조선족을 비하시키는 사회 통념이 우리나라에 자리잡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돈이 필요한 '대한민국 국민'인 신용불량자에게 싼값에 살인을 의뢰한다면, 이는 신용불량자를 비하시키는 내용이라 말 할 수 있을까? 
구남이가 살인을 저지르고 받는 돈은 우리나라돈으로 약 3천만원. 나홍진 감독이 저지른 잘못이라면 인터뷰에서 '단돈 삼천만원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렸다고 말한 것일게다. 중국에서 삼천만원이라면 그 또한 적지 않은 돈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돈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조선족'을 이용했다는 것에서 비난이 나오고 있는데 그렇다면 조선족을 고용한 식당주들은 모두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물론 '식당 종업원'과 '살인자'가 똑같으냐는 질문이 올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이 영화에서 '살인을 사주'하는 자는 바로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것을. 면정학 또한 한국에서 의뢰를 받은 것이다.
사실, 조선족이 사람을 죽이는 설정보다는, 조선족을 이용하여 살인을 사주한 '한국사람'이라는 설정이 더 불쾌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진실이다. 아무리 외면해보려 하지만 평범한 두 '한국인'들이 조선족을 고용해 살인을 사주한 것은 결코 그 모양새가 좋지 못하다.

진실이 불편한 이유는, 내가 대면한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아닌 거짓이라면, 혹은 상상속의 이야기라면 불쾌할 일이 절대로 없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꼭 조선족만 비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바로 경찰이다.


<황해>에서 경찰은 희화화 되어 등장한다. <추격자>에서도 경찰은 그리 좋은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의 의도건 아니건간에 경찰은 구남이를 놓치고, 그 과정에서 같은 경찰이 죽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황해>에서 비하 대상으로 나온 것은 다름아닌 '경찰'이 아닐까? 조선족은 '이용당하는' 존재로 나오고 그 이면의 생활, 슬픔, 암울함이 나타나지만, 사회의 지배계층에 있는 존재들, 즉 은행원, 버스회사 사장, 경찰들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제대로 하는 일도 없는 존재로 나온다. <황해>에서 경찰들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정말 저럴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 상황이 되면 정말 저럴지도...'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모습이다.
경찰은 구남이를 총 두 번 놓치게 된다. 구남이가 김승현의 손가락을 자르고 도망칠때와 위의 스크린샷에서 처럼 버스를 타고 도망을 가다가 걸렸을 때다. 두 번 모두 경찰들은 구남이를 '거의' 잡은 상태에서 놓치게 된다.
영화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구남이가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훨씬 '극적이고' '납득할만한' 방법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위와 같은 장면들을 만들어 낸 것은 일종의 '풍자'정도로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

5. 폭력

 

 
<황해>의 폭력은 멋이 없다. 스타일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해두지 않은, 원초적인 폭력이다. 대중들은 이러한 '원초적인' 폭력에 불쾌감을 갖는다. 등장인물들이 피칠갑이 되서 돌아다니고, 목이 찢어져 피가 분수처럼 흐르는 모습에 '폭력성'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근래 한국영화에서는 '폭력의 리얼리티' 같은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류승완감독 같은 스타일리스트 조차도, <부당거래>에서 그 특유의 스타일을 죽였다. 리얼리티의 종류가 조금씩 그 방향을 틀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한국영화에서 리얼리티가 없다는 말을 찾아 볼 수 없을정도로, 한국 영화는 그 쪽으로 진보했다. 그러나 그 리얼리티 조차도 매너리즘이 되어가는 시대이다. 나홍진 감독이 <황해>에서 보여준 폭력은 충분히 리얼하다. 생사가 달린 문제에서 있을법한 폭력들. 그러한 리얼리티를 대중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폭력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황해>에서 나오는 폭력의 리얼리티는 논문 한 편을 써도 될 정도로 할 이야기들이 많다. 구남이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에서 나오는 도망자로서의 폭력, 면정학의 포식자로서의 폭력은 지배와 피지배자간의 폭력으로 대신할 수 있다. '밟으면 꿈틀거릴 수 있는', 밟는자와 꿈틀거리는 자의 폭력이다.
<황해>가 잘 만든 영화라는 것은 이러한 폭력의 방식, 즉 구남이와 면정학이 보여주는 뚜렷한 자기목적하에 발생한 폭력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구남이는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그 폭력은 본능이다. 꿈틀거리는 지렁이. 혹은 궁지에 몰린 작은 설치류 동물들이 보여줄 수 있는 독한 폭력이다. 면정학의 여유로운 폭력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6. 황해 속으로 빠져버린 <황해>


나홍진 감독은 황해의 주인공들과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 그 역시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 '욕망'을 표현하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구남이와 마찬가지로, 영화에 대한 어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두시간 삼십분이라는 긴 런닝타임 동안 이것저것 많이도 채워넣는다. 그리고 그의 영화는 '대중'이라는 이름의 바다속으로 빠져버렸다.
그 수많은 비난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황해>가 일찌감치 스크린을 벗어났다는 것은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도 생각보다 일찍 막을 내렸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라면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이 대단하다는 것. 그리고 '사회문제'를 희화화 시켰다는 점이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본전은 뽑지만 대박은 건지지 못했고, 그래도 <부당거래>의 이른 하차는 안타까웠지만 나홍진 감독의 <황해>는 좀 더 기대해볼만 했다. 충무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두 배우, 하정우와 김윤석의 연기만으로도 이 영화는 흥행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해>의 침몰은 안타깝다. 대중들이, 황해에서 보여주는 그 불쾌한 진실을 선뜻 맞대면 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진실이란 불편한 법이다. 그렇기에 진실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황해>에서의 진실은 조선족 비하나 중국인들에 대한 편견 같은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좀 더 깊숙한 곳 어딘가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추악하며, 대중들은 인간이 원래는 추악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황해>는 근래 내가 본 영화중에 가장 머릿속에 오래 남는 영화였다. 살고자 하는 구남이의 모습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속하기 어려운 '조선족' 구남이의 마지막 장면은 흡사 최인훈의 '광장'에 나오는 이명준을 연상시킨다. 이명준과의 다른 점이라면 현실을 탈출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것이 자의냐 타의냐의 차이 뿐이다. '광장'이 이념에 대한 이야기라면 <황해>는 두 극단으로 나뉘어진 현실의 이야기다. 그리고 현실은 생각보다 치열하며 잔인하다. <황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Fin...




  1. 북학 2011.04.06 00:08 신고

    첫독자의 영예가 내게주어졋군요.재밋게 잘 읽엇어요. 해석과 평가가 나와 다르긴하지만 열정가득한 글이라..보기 좋아요.이 즈음 관객이란 자들은 블편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할 뿐아니라,그런 불편한 메시지에 짜증까지낼 기세같아요. 황해는...개인적으로 그 데목이 젤 맘에 들어요. 천안서 상경하는 기차창밖에 비첫던 삼류대형간판속 황해라는 선명한 글자...도저히 주인공이 누군지 짐작도 할수 없게 그려졋던 구남곽 면정학....난 저넘의 누런 황해가 숨막히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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