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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감이 떠오른다. 한 남자는 테이블에 앉아 냅킨 한 장에 펜으로 예언처럼 떠 오른 그 영감을 열심히 적는다. 미국 드라마 매드맨(Madmen)의 한 장면이다. 바(Bar)에 근사한 여인이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바텐더는 칵테일 한 잔과 메모지 한 장을 들고 여자의 테이블을 찾는다. "저쪽에 앉아 있는 남자분께서 사는 겁니다." 그날 처음 만난 남녀가 함께 밤을 보내고, 남자가 눈을 떴을 때, 여자는 화장실 거울에 립스틱으로 자신의 연락처를 남겨놓고 떠난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어느 로맨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흔한 클리셰지만 우리는 이런 장면들에서 일종의 낭만을 경험한다. 메모지, 펜, 립스틱, 거울. 저물어가는 아날로그 시대의 낭만이 아니던가. 


  이제 우리는 영감이 떠 오르게 되면 더 이상 노트와 펜을 꺼내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다면 메신저의 아이디를 교환한다. 모든 것들은 클라우드 안에, 0과 1이라는 숫자의 조합으로 저장된다. 그리고 이 디지털 메모들은 스마트폰으로, 컴퓨터로, 태블릿으로 언제 어디서나 보고 지울 수 있다. 늘 깔끔한 상태로 메모들을 분류 및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스마트한 사람'이라는, 작위(爵位)를 부여한다.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에 종이와 펜은 구닥다리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계승한다며 스마트폰(혹은 태블릿)에 펜을 달고 노트의 기능을 추가했다. 그것은 마치 디지털 음원에 잡음을 집어 넣고 비닐 레코드의 감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그런 것들이 종이와 펜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라 생각한다. 감성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근래들어 고급 노트와, 고급 펜의 판매량이 늘어난다고 한다. 다시 비닐 레코드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필름 카메라를 쓰는 사람들도 늘었다. 당장에는 기쁜 소식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지친 현대인들의 아날로그로의 귀환이라. 그럴 듯하다. 아니, 오히려 반가워해야 할 상황인가. 


  종이와 펜은, 세상 그 어떤 디지털 매체 보다도 더 오랜시간 살아남아왔다. 아무리 최신 기술의 저장장치라 하더라도, 평생을 쓸 수는 없다. 이론상 광디스크는 거의 반편생 쓸 수 있지만, 지금 CD나 DVD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찾기란 쉽지 않다. 모든 것은 '파일(File)'화 되어있고, 필요가 없으면 언제나 지워버릴 수 있다. 그러나 종이나 펜은 사정이 다르다. 종이에 펜으로 쓴 메모들은 쉽게 없애버릴 수 없다. 종이에 펜으로 무엇인가를 적는 그 순간 글(text)은 생명력을 얻는다. 찢어버리거나, 지워버리려 해도 흔적은 남는다. 내 손의 감촉, 노트 뒷면에 희미하게 새겨진 자국들이 그렇다. 


  종이에 펜으로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일종의 예의를 갖춰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들은 우리보다 더 오랜시간 살아 남은, 그리고 살아 남을 종(種)이 아니던가. 종이와 펜은, 디지털 라이프에서 지친 인간들의 도피처나 다름없다. 우리는 아날로그를 단순히 호기심, 혹은 유행의 한 부분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실상 아날로그 적 삶은 지금 이 시대에 생각보다 쉽지 않다. 당장이라도 우리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없으면 마치 질식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하지만, 아날로그, 특히 종이와 펜에는 우리가 얕봐서는 안될, 어떤 아우라 같은 것이 존재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 종이와 펜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감성을 지는 아날로그 필기구들에게서 깊은 존경심 같은 것을 갖게 된다. 그러니 잠깐 디지털 기기들을 손에서 놓고, 조금은 경건하고, 약간은 예의를 갖추며 종이와 펜을 맞이해보자. 그리고 무엇이든 좋으니 첫 문장을 적어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도 여러분들은 그 문장을 컴퓨터의 파일 지우듯 지우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1. Favicon of http://koyeseul.net BlogIcon 책덕후 화영 2016.04.24 21:53 신고

    저도 메모를 디지털로 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그래도 스케줄러는 아날로그식으로 씁니다. 감성적이라서가 아니라 그게 더 빠르고 효율적이더군요.

    • Favicon of http://heejune.net BlogIcon Heejune 2016.04.25 07:34 신고

      저도 급할 땐 디지털로 메모를 하지만, 결국에는 수첩에 전부 옮겨 적습니다. 펜을 꺼내서 바로 적는 것이 사실은 가장 빠른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수첩과 펜을 가지고 다닙니다. 좋은 덧글 감사드려요 ^^

  2. Favicon of http://sequestered.tistory.com BlogIcon 이리오시 2016.04.24 23:05 신고

    추억일 뿐, 그 도구만의 감성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날로그 -> 감성으로 이어가는 종류의 글을 볼 때마다 느끼는거죠. 생각해보세요. 종이와 펜 이전의 수단이 있었겠고, 그럼 그 이전에 더 어렵게 기록하고 혹은 외웠었던(예를 들자면) 그 방식이 아날로그이고 종이와 펜이 디지털이라고는 할 순 없는거잖나요. 일부는 공감하지만 처음에 썼다시피 그저 추억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 Favicon of http://heejune.net BlogIcon Heejune 2016.04.25 07:33 신고

      감성이라는 표현은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펜이나 종이도 개발되어가는 과정에서 '과학'적인 방법들이 동원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리오시님 말씀대로 '디지털'이라고 말하지는 않지요. '디지털'은 개념이 다릅니다. 그리고 디지털나름의 감성도 존재하고 있지요. 당장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영화 '접속'이나 '후 아 유' 같은 것들이 있겠습니다. 어쨌든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3. Favicon of http://doolytubbies.tistory.com BlogIcon 둘리토비 2016.04.25 00:23 신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조화로운 설정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구분을 하게 되거든요. 각각의 영역별로 그러기에 종이와 펜도 적절하게 활용하고
    디지털 기기로도 활용하고 그 가운데서 계속적인 영감을 얻고 창의성을 기르면 되겠지요~^^

    • Favicon of http://heejune.net BlogIcon Heejune 2016.04.25 07:30 신고

      시대의 흐름을 거부할 수도 없으니 적절하게 조화를 하면 좋겠지요. 저도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적절하게 구분하여 이용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다만, 간혹 종이와 펜을 이용할 때, 이들에게 대한 어떤 경외심 같은 것이 느껴져서요. ^^

  4. Favicon of http://booklikedream.tistory.com BlogIcon 다재다능르코 2016.04.25 23:43 신고

    전자책이 나와도 여전히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듯, 알파고가 나와도 여전히 '사람'이 더 가치를 갖듯 ㅎ 아무리 디지털기술이 발달해도 '아날로그'특유의 특성들은 따라오기 힘든것 같아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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