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간이 아닌 종족'의 차이점은 명확하게 구분된다.
즉, 인간은 사고의 깊이가 있으며 '인간이 아닌 종족'들은 사고에 깊이가 없다.

개나 소나 다 들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SF소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
어느날 집에서 키우던 개가 벽에다가 이상한 문양의 그림을 발톱으로 그렸다고 치자.
개주인은 당연히 놀랄 것이다. 수의사에게 데리고 가야하나? 그러기엔 개의 행동이 특이하다. 그래서 국가기관 어딘가에 신고하겠지.

국가기관 어딘가에서 온 '요원'들은 개를 데리고 가서 이리저리 실험을 할 것이다. 도대체 저 개새끼가 그려놓은 것이 뭘까? 그냥 배가 고파서 벽을 긁어놓은 것일까? 그러기에 원은 비뚤어지지 않고 사각형은 각도가 정확하며 직선은 구부러지지 않았다. 이제 그들의 눈에 '개'는 더 이상 '개'가 아니다. 그들은 다른 개들을 의심할 것이고 다른 개들은 복날도 아닌데 이곳 저곳으로 끌려가 실험을 받게 될 것이며 정부는 쉬쉬하면서 개가 '몰락한 어떤 외계문명의 퇴화된 종족' 이라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우리의 친근한 이웃 '개'는 이제 외계인 대접을 받으며 시험관에서 주사 바늘에 이리 찔리고 저리 찔릴 것이며 애완동물 협회 같은 곳에서 용케 그 사실을 알고 언론에 뿌릴 것이고 엘비스 프레슬리가 개로 환생했다는 등 외계인의 첩자가 개였다는 등 우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등 오만가지 개소리가 퍼져 나갈 것이다. 개를 먹었던 사람들은 어떤 외계 바이러스에 전염 될 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격리 당할 것이고 이 세상은 이제 개판이 될 것이다.

인간도 동물이며 개도 동물이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인간은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개는 그릴 수 없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위의 예시대로 개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과 개 사이에 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 개가 그림을 그리면 그것은 더 이상 개가 아니다.

세상의 어떤 생명체든 '생각'은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곤충이 그 작은 대가리로 생각을 해봐야 얼마나 생각 할 수 있겠는가? 사고의 깊이가 얕은 생명체들은 모든 상황을 감각과 본능에 맡긴다. 인간은 이런 생명체들 보다 사고의 깊이가 더 깊어서 상황을 감각과 본능에 맡겨야 하는지에 대해 의심한다.

사고의 깊이는 의심에서 나오고 의심은 인간만의 종족 특성이다.

인간은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는 유일한 생명체인데 그 이유는 죽은 이후가 '의심'되기 때문이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좋게 말하면 호기심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심 = 호기심 이라는 공식을 도출해 낼 수 있다. 호기심은 인간을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위에서 언급한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경험론자들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거나 수면제를 몇 십알 쑤셔 넣던가 천장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맨다. 그래도 우리는 답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는 죽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데 살아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경험론자들의 특권이랄까?
그래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가설들을 내뱉는다. 죽음 뒤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이다(기독교 신자). 죽고 나면 다른 생명체로 '환생' 할 것이다(불교 신자). 죽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그냥 '무'의 상태로 멈춰져 버릴 것이다(다수설). 인간들은 끊임없이 궁금증을 만들어내고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어내기 위해 이것 저것들을 의심해본다. 그 과정에서 다른 호기심이 생겨나고 그렇게 문화는 발전한다.

재미있게도 많은 사람들은 '죽음' '삶' '사후세계' 따위의 말들도 모두 인간이 편의상 만들어낸 단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아주 오래전...그러니까 '죽음' '삶' '사후세계' 따위의 단어들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옆에서 함께 사냥을 하던 누군가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아무리 흔들어도 조금 전 처럼 미치광이 같이 뛰어다니지 않더라. 쓰러지지 않은 사람은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게 도대체 왜 움직이지도 않고 저 상태로 계속 있을까 궁금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은데 딱히 그 상황을 표현 할 만한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죽음' 이라는 단어를 편의상 사용한 것이다.
이 '죽음' 이라는 단어가 생긴 이유는 '왜 다른 사람이 움직이지 않을까' 라는 궁금증과 의심과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호기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다른 생명체들과 지금도 똑같이 저 푸른 초원을 뛰어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개가 어느날 같이 짖어대던 동료개가 짖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그 상황이 궁금하고 의심스러웠다고 생각해보자. 개는 생각을 할 것이다. 왜 저렇게 움지기이지 않고 있을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저렇게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있나보다 라고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문명은 의심과 호기심으로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인간대신 개가 의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개가 던져주는 뼈다귀를 받아먹으며 다리를 흔들어대고 있었겠지. 하지만, 진정한 인류의 기원이나 역사나 지구의 비밀 따위를 인간이 밝혀 낼 것이라는 것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악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대의 비밀이나 죽음의 비밀 따위는 가장 쉬운 곳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별다른 장비도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마지막으로 의심스러운 것은 인류 기원의 비밀이나 우주의 비밀 같은 것이 정말 있기는 한가 하는 것이다. 비밀 따위는 없다. 다만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일 뿐.

이것이 나의 결론이자 이 개소리의 결론.


  1. sue 2007.02.02 14:57 신고

    인간의 四顧.
    1.살고
    2.죽고
    3.먹고
    4.사랑하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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