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on EOS 6D


사진관련(혹은 카메라 관련) 커뮤니티에 소위 1면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때로는 헛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반쯤 벌거벗은 여인네들의 사진 밑으로 그러한 사진의 의미를 강제적으로 부여하려는 듯 적어놓은 오글거리는 문장들을 볼 때면, 심지어 공허해지기까지 한다. 덧붙이자면, 그런 사진들의 밑에 붙는 덧글들, 그러니까 "좋은 시선", "아름다운 모습" 등의 칭찬 일색 글들은 사실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끔 만들기까지 한다. 


우리는 왜 사진을 찍는가.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사진을 찍기위한 도구, 즉 카메라 혹은 장비에 대한 의문일 것이다. 

나는 (보급형이라고는 해도) 적잖은 금액을 투자하여 풀프레임 카메라를 구입하기까지 수많은 시간들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한 고민은 내가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카메라가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스스로 풀프레임 카메라에 대한 필요성을 납득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고, 결과적으로 나는 몇 달 간을 심사숙고 한 뒤에 그것도 보급형 풀프레임에 단렌즈 하나를 구입한 것이다. 

풀프레임 카메라는 필름 시절을 디지털로 복기시킨 것과 다름없다. 아날로그적인 판형을 강제로 디지털화 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필름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풀프레임 카메라'란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은 슬픈 생각이 들었다. 필름카메라가 몰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저렴한 가격에 '풀프레임' 카메라로 신중하게 사진생활을 했을 것이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카메라를 구입했는데, 정작 찍어야 할 피사체가 마땅치 않다면 그보다 더 당혹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누구나 찍는 평범한 꽃과, 나무와 구조물 밖에 없다면 기백만 원을 투자하여 구입한 장비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같은 취미를 가진 다른 누군가를 열광시키기 위해, 그리고 '본전'이라도 뽑자는 심정으로 모델촬영을, 때론 선정적이기까지 한 사진들을 찍어 커뮤니티에 올리고 싶은 욕망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말로 대신하자면 그런 사진들에게서 '영혼'이란 보이지 않는다. 


무슨 개소린가. 사진에 영혼이라니. 어쨌든 취미 생활은 존중받아야 하고, 그래서 내가 무슨 피사체를 찍든 그것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사진은 사진일 뿐. 즐기면 그만이 아닐까, 라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물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게 공허한 셔터질을 해댔을 때 느껴지는 만족감 이면에 다가오는 허무함은 어쩌란 말인가. 허무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상관없지만, 그런 사진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사진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사진을 감상하는 이들이 알지 못한다면, 그 사진은 피사체에 대해 충분히 고민을 하지 않고 찍은 '공셔터'에 불과한 것이다. 나 혼자 감상하는 것이 아닌, 다수의 사람들이 사진을 감상한다면, 사진을 찍는 사진가들은 피사체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예의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풀프레임 카메라를 구입한 뒤, 한 가지 좋았던 점은 피사체에 대해 좀 더 고민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졌다는 것이다. 크롭바디에 비해 표현할 수 있는 방법들이 좀 더 다양해진 것이다. 풀프레임에서 그 어떤 화각의 손실도 입지 않은 50mm의 화각이 때로는 풍경에, 때로는 스냅 촬영에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렌즈 하나로 가능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뭐랄까, 크롭바디를 이용했을 때보다 좀 더 풍요로워졌다고나 할까. 그런데 일전의 모 커뮤니티의 6D에 대한 '기기적 논쟁'들을 보면서 결국 상급기종보다 '약간 불편할' 지언정 결과물에 차이는 없는데 왜 이러한 논쟁들이 생겨나는지에 대해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나의 몰이해는 "도대체 이 수많은 사람들이 어째서 저렇게 비싼 장비들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확장되어갔다. 개중에는 물론 상업작가나 프로작가들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와 비슷한 '취미 생활'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때론 왠만한 차 한 대 값 정도 되는 장비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부럽다기 보다는 "무엇을 찍으려고?"라는 의문이 앞서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장비란, 사진과 연관이 된다. 아빠백통, 엄마백통이 아무리 좋고, 캐논 유저라면 꼭 써봐야 하는 렌즈라 할지언정, 내가 망원렌즈를 이용할 일이 없다면 그 렌즈는 내게 필요한 렌즈가 아니며, 당연하게도 구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뽀대'가 난다고 해서 백통을 구입한다면, 그보다 더 낭비는 없는 것이다. 


내가 풀프레임 카메라를 구입하면서 단순히 50mm 단렌즈 하나만을 구입한 이유는 광각 풍경사진으로는 이미 펜탁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풍경 사진의 용도에 있어서 펜탁스 카메라의 색감을 따라올 기종은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캐논 카메라는 예쁘고 매력적인 색감을 가지고 있지만, 문제는 그 예쁘고 매력적인 색감이 내가 볼 떄 풍경사진에서는 어떤 종류의 '이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 눈이 적응이 덜 됐기 때문이겠지. 


좋은 장비가 좋은 사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것은 '분명한 팩트'인 것이다. 그러나 나쁜 장비 또한 좋은 사진을 만들어 낸다. 사실 요즘의 장비들은 어느 것 하나 나쁜 사진을 만들어내는 것은 없다. 다만 이제는 사진의 화질이나 색감이 아닌, '어떤 사진'을 '표현'해야 할까, 의 문제인 것이다. 좋은 장비가 좋은 사진을 뽑아 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만들어 낸다고는 볼 수 없다.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카메라가 아닌 사진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가 오는 날은 카메라를 제습함에 넣어두거나 방 안에서 음식사진을 찍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산을 쓰고, 카메라를 메고, 밖으로 나온다면 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찍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피사체'가 아닌 '이야기'를 찍어야 할 시점이 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미래의 언젠가, 비가 오던 어떤 날의 사진을 다시 뒤적거렸을 때, 그때의 이야기들이 생각나며 미소를 지을 때가 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1. 2013.07.09 08:10

    비밀댓글입니다

오늘 머리를 다듬으러 미용실을 갔는데, 내 머리를 봐주던 남자 미용사가 내게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 직업이 '작가'라고 대답했다.

미용사에게 내 직업을 '작가'라고 말을 한 이후, 나는 무척 창피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미용사가 머리 괜찮으세요? 라고 물을 때도 그냥 건성건성 대답했을 뿐이다. 미용사가 '어디 가세요?' 라고 물었을 때, 그냥 '데이트요.'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내가 왜 생전 모르는 사람에게 내 직업을 '작가'라고 이야기 했을까? 라는 경솔한 내 발언에 대한 후회 뿐이었다. 대학원생도 있고, 그냥 백수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작가' 라고 이야기 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내 첫 출간작품은 상하로 나뉘어진 두 편짜리 SF 소설이었다. 물론 이 소설은 실패했다. 영화 2012의 주인공처럼, 내 소설은 1천부도 채 팔리지 않았다. 출판사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그 이후에 나는 '창비' 신인상에 도전했고, 결과는 본심에서 끝났다. 한동안 나는 내가 '작가'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 어느 헌책방 귀퉁이에 내가 쓴 책의, 그것도 '상' 권만 꼽혀 있는 모습을 보고, 내 작가 인생은 청계천의 어느 헌책방에서 끝나는 구나, 라고 체념했다.

우리나라에는 '등단' 제도가 있어서, 어디가서 함부로 '나는 작가요' 라는 말을 하기가 꺼려진다. 그러면 '등단 하셨습니까?' 라는 질문이 돌아오게 마련인 것이다. 일반인들조차 작가란(혹은 '문학'을 하는 작가란) '등단' 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 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책을 출간한 적이 있지만, 나는 그 책을 내 마음속에서만 기억하고 싶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누구나' 등단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 여기에는 여러 주석들이 달려있긴 하지만 어쨌든 마음만 먹으면 '나는 작가요' 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등단제도라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듯 해서, 그냥 글을 쓰면 '작가' 라는 직함을 내걸 수 있는 모양이다. 영화 '리미트리스' 의 주인공도 책을 한 권도 내지 못했는데 자신을 작가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는가. 등단이라는 말보다는 그저 '데뷔'라고 이야기하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나 일본의 사정은 좀 다르다. 등단이란 아마추어와 프로를 구분하는 하나의 시험과 같다. 그러니까 비로소 등단이 되었을 때, 우리는 프로작가가 된다. 등단을 하지 못한 작가는, 마치 사법고시생이 '나 변호사요' 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오늘의 경험으로 비추어봤을 때, 나는 내 자신을 분명히 '작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법고시하고는 사정이 약간 다른 것이다. 컴퓨터를 켜고, 하얀색 워드프로세스를 맞이하여 첫 단어를 찍는 순간 우리는 모두 작가가 되는 것이다.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자기합리화가 존재하는가? 분명히 단어들과 문장들로 뭔가를 생산해 낸다면, 그것이 팔리든 안팔리든 그 사람은 작가인 것이다. 자동차 영업사원이 자동차를 한 대도 못팔지언정, 그의 직업은 자동차 영업사원인 것이다.

작가란 내 재주를 '파는' 직업이다. 그러니 어쩌면 '작가'라는 직업은 영업사원과도 비슷하다. 능력제인 것이다. 작가란 대중에게 '이야기'를 판다. 얼마나 재밌는 이야기를 파는가는 작가의 능력이다. 그러니 당장에는 돈이 안들어오고, 내 글이 대중들 앞에 나오지 않더라도 나는 '작가'다. 다만, 이야기를 파는 내 능력이 신통치 않을 뿐이다.

나는 등단을 하기위해 글을 쓴다. 이것은 내 고집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글을 쓰는 것이 내 삶이다. 나는 일곱살 때 첫 동시를 지어서 한정된 '대중'에게 보여주었고, 나름의 평가를 받았다. 나는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사 줄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생산해 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등단'을 해야 한다. 서양이 어떠니 해도, 대한민국에서 내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보여지려면, 등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글을 쓴다.
나는 '작가'다.
  1. 나기 2012.04.15 06:24 신고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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