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무리하다'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모아서 정리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컴퓨터가 그리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 우리는 어떤 자료를 얻기 위해서는 책이나 신문을 뒤졌다. 그리고 그 자료를 보관하는 방법은 '갈무리', 즉 원하는 정보가 있는 잡지나 신문, 책을 구입하여 보관하던가, 혹은 그 중 원하는 부분만 오려서(때로는 과감하게 찢어서) 별도로 보관하기도 했다. 이렇게 정보들을 잔뜩 모아 놓은 두꺼운 자료집들은 자기만의 보물이었다. 책꽂이 가득 꼽혀 있는 자료집들은 때로는 누군가의 일생을 모아 놓은 총체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검색의 시대'가 찾아왔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검색해봐" 라는 말이 일상이 되었다. 과거에는 정보를 얻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두꺼운 책들을 몇 시간이고 뒤적여야 했다면, 지금은 초 단위로 정보를 검색해 낼 수 있다. 구글은 검색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라왔다. 그것은 아마 대부분의 포털 서비스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검색이란 이 시대의 기본으로 자리잡았다. 어느 웹사이트를 가도 검색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초창기 검색엔진은 검색 조건이 별도로 존재했다. 예를 들어 '영화'와 '배우'를 검색하려면 '영화 and 배우'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럴 필요 조차도 없어졌다. 어떤 방식을 이용해서 검색을 해도 결과는 나온다. 


  결과는 나온다. 인터넷에는 인터넷이 발달하기 이전의 자료들 조차도 준비되어 있다. 여러분들이 1930년대 동아일보를 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1930년대에 나와있는 동아일보를 볼 수 있다. 여러분들이 한겨레 창간호를 보고 싶다면, 간단하다. 검색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이 검색이 되는 편리한 세상이지만,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편리함만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자신의 이름이 인터넷에 검색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돈을 받고 인터넷에 떠 있는 자신의 정보를 대신 지워주는 업체까지 생겨나는 형편이다. 조지 오웰의 <1984> 이후, 사람들은 정말로 '감시당하는 세상'이 올까 의문을 가졌지만 실제로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검색은 곧 검열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우리는 <1984>의 바로 그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정보를 남겨야하고, 때로는 아주 손쉽게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접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어떤 면을 검색 몇 번으로 찾아 낼 수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SNS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낙관적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검열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제 영화에서는 누군가의 정보를 알기 위해 굳이 그 사람의 컴퓨터를 해킹하거나 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검색하기만 하면 끝이다. 검색의 시대. 우리는 검색을 하는 것인가, 검색을 당하는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iPhone 5s


* 사진을 무단으로 퍼갔을 경우, 법적인 조치를 받습니다.


SNS, 실체가 없는 공동체


부정해봐도 소용없다. 우리는 이제 SNS, 그러니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근본적으로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계정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런 서비스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연일 SNS와 관련된 뉴스를 내보내고 있다. 트위터를 쓰지 않는 사람들도, 트위터가 무슨 서비스인지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SNS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SNS가 무슨 대단한 기술을 요구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0과 1로 만들어진 어느 실체가 없는 세상에서 역시 '0과 1'로 만들어진 목소리를 뱉어내는 것이다. 내 목소리는 때로는 디지털 세계의 유령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와 '접속'하기도 한다. 가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SNS이다. 


SNS는 실체가 없는 공동체이다. 여기서 '실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뜻보다는 조금 더 내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내가 남긴 트윗을 'RT'를 한다. 누군가는 내 페이스 북의 글을 보고 '좋아요'를 눌러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군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왜 확신이 없느냐고 물을 수 있다. 내게 '좋아요'를 눌러준 사람은 내 친구이며, 오프라인에서도 자주 만나는 사람인데, 어째서 실체가 없다고 말하느냐고 따질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의 글에 '좋아요'를 눌러주고, 리트윗(RT)을 한 사람은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실체가 없는 사람들이다. 나또한 그렇다. 나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현실, 즉 '오프라인'에서는 실체가 존재하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그저 0과 1의 집합체일 뿐이다. 온라인 안에서는 누구나 0과 1로 존재한다. 이 두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존재들은 전 세계에 걸쳐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룬다. 그러나 실체는 없다. 내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러준 누군가를 나는 알고 있지만, 디지털 안에서 그, 혹은 나는 하나의 추상적은 숫자 조각들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는 디지털 고스트, 즉 전자 유령이나 다름없다. 


당신은 SNS 중독자입니까?


생각해 볼 문제이다. SNS를 하지 못하면, 마치 소외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현실, 그러니까 '오프라인'에서는 천대받고, 멸시받으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을 어떤 누군가는 사실 SNS에서는 스타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개의 세상을 오고가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는 디지털의 세상이고, 또 하나는 그 디지털의 세상을 가공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현실에서도 대부분의 시간들을 SNS를 하면서 소비한다. SNS는 정치적으로, 상업적으로, 그리고 개인의 억압된 욕망을 자위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그러니 SNS는 그 어느 기술보다도 더 빠르게 진보했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SNS에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쯤에서 나는 그대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은 그렇다면 SNS 중독자일까요?


SNS는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


왜냐하면 때로는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그러니까 명동 한 복판에서 "나는 삶이 정말 짜증난다."라고 외칠 수 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명동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들이고, 내가 만일 명동 한 복판에서 "나는 삶이 정말 짜증난다."고 외쳐봐야 위로는 고사하고 미쳤다고 생각하며 비웃음만 사게 될 것이다.

그러나 SNS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SNS에서는 내가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게 "나는 삶이 정말 짜증난다."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위로를 해줄 것이고, 누군가는 삶이 왜 짜증이 나는지 이유를 물어볼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당신(혹은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SNS에서 조차도 누구하나 내 목소리에 신경쓰지 않고 귀기울여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재앙이나 다름없다. 현실에서도, 그렇다고 가상세계인 디지털 내에서도 누구하나 내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슬픈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소외되고, 고독해져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삶에 SNS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가에게는 약이고, 누군가에게는 독이 된다. 누군가에게 SNS는 기회이며, 또 누군가에게 SNS는 절망일 것이다. 우리는 사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문명의 이기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의 소외감이나 절망, 고독함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만, 디지털 내에서 느끼는 이러한 감정들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더욱 더 고독하고, 절망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SNS의 시대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자명하다.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저 걸어온 대로, 다시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허공에 대고 외치는 메아리가 아닌, 나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 중심을 잃지 말라고. SNS는 그저 하나의 도구이며 수단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점점 곰팡이가 생긴 식빵처럼, 그렇게 SNS에 잠식당할지도 모른다. 


Google+ 라는 것이 생겼다. 구글에서 제공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보면 된다. 페이스 북과 트위터를 견제하기 위한 서비스라는 것은, 위의 스크린 샷으로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구글은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 한 적이 있었다. 구글 웨이브, 버즈 같은 서비스 말이다. 그리고 이 서비스들을 국내에서 제대로 이용하는 유저들은 드물다. 그래서인지 구글은 지난 소셜 서비스를 개량/발전 시키는 대신,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었다. Google+ 가 그렇다. 뒤에 '프로젝트' 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구글 플러스에 로그인 한 화면이다. 구글의 문제는 바로 '초대장' 에 있다. 초대장이 없으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 만약에 구글이 이 서비스를 페이스 북 만큼이나 활성시키고자 했다면 초대장제도는 구글의 발목을 잡을 수 밖에 없다. 뭣하러 거추장스럽게 초대장을 얻으러 다녀야 하는가.

인터페이스는 페이스의 그것과 별다를 것이 없다. 서클이라는 서비스가 있지만 '즐겨찾는 친구'를 인터페이스만 바꿔 놓은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라이브 웹캠을 이용한 '수다방' 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실 대한민국에서 '라이브 웹캠'을 얼마나 이용하겠는가? 일단 대부분의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가 모바일로 넘어온 이상, 페이스 타임, 영상통화 같은 것들이 있기에 PC상으로는 큰 효용이 없어보인다. PC로 영상채팅을 하려면 이미 다른 편리한 서비스들도 많다. 이를테면 네이트 온이나 MSN 같은 것들도 영상채팅을 지원한다.

구글의 새로운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인 Google+는 '구글 이용자'들을 끌어들여 소셜 네트워크의 강자가 되겠다는 구글의 야망이 보이지만 현실의 장벽은 두껍기 짝이 없다. 일단 국내에서는 페이스 북이 선점하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 북이 국내에서 성공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김연아를 비롯한 유명 스타들이 이용을 했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만약에 Google+가 국내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영향력' 있는 스타들이 이용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페이스 북을 Google+가 이겨낼 방도는 없다. 그저 구글의 '실험적인'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중에 하나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또하나 난점은 위에도 언급했던 초대장 제도이다. 베타 서비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대장 제도는 사실 서비스 확산에 도움은 되지 못한다.

구글이 Google+ 를 성공시키려면, 적어도 국내에서 사용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현재로서는 획기적인 무엇인가는 찾기 힘들다. 단지 번거로운 인터페이스만 보일 뿐이다. 지적했던 단점들을 보완하지 못한다면, 구글 웨이브, 버즈와 같이 기억에서 잊혀져 갈 서비스 중에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 사실, 구글은 다양한 분야에 발을 뻗히고 있지만, 안드로이드와 지메일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크게 히트한 상품은 없다. 구글 맵 정도가 그 뒤를 따르고 있지만 이마저도 다음과 네이버하고 경쟁해야 한다. 새로운 실험정신은 좋지만, 국내 IT의 다양한 특수성을 감안해보건데, 정말로 획기적이거나, 수많은 스타들이 이용하지 않는 한,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 2011.07.14 00:10

    비밀댓글입니다

  2. 2011.07.14 00:10

    비밀댓글입니다

  3. 2011.07.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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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07.1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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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1.07.14 06:17

    비밀댓글입니다

  6. 치노엄마 2011.07.15 10:48 신고

    크롬에서 이용하시되 관련 플러그인 몇개 더 깔고 사용해 보세요.
    UI가 엄청나게 편합니다.
    나머지도 몇가지 반론하고 싶지만 바빠서 이만...


국내 최초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라고 볼 수 있는 '싸이월드'를 기억해보자.
싸이월드는 '접대'로 대변되던 '인맥'관리에 있어서 새로운 개념을 선보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니홈피'에 생활을 공개하고 '친구'들과 그 생활을 공유하였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싸이월드는 생각보다 폐쇄적인 서비스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사생활을 공유하려면 '친구'로 등록되어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본 프로필 조차도 볼 수 없다. 싸이월드의 성공 이면에는 이러한 폐쇄성이 밑받침 되어 있었다. 한 개인의 사생활을 보기 위해 그와 친구추가를 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친목'의 정도가 결정된다. 그러니까 '아는사람들'끼리의 친목인 셈이다.

페이스 북이 어느날 혜성처럼 등장했다. 페이스 북은 싸이월드의 폐쇄성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접근했다. 친구추가의 과정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페이스 북의 친구추가는 훨씬 간단하다. 친구추가를 요청하면 거절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싸이월드가 아는 사람들 간의 친목의 공간, 즉 원래 있던 인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공간이라면 페이스 북은 새로운 인맥을 생산해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트위터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친구가 있을 수록 그 사람의 인기도가 결정된다. 게다가 싸이월드와는 달리 전 세계의 사람들, 인기스타들과도 친구를 맺을 수 있다. 그야말로 페이스 북은 개방화 소셜 네트워킹의 정점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개방화'가 역으로 족쇄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SNS 이용자들이 자신이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직장인들이 두 개 이상의 복수 트위터 계정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족쇄이론'을 뒷받침해준다. 복수의 트위터 계정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일상을 이야기하는 계정과 '직장상사'에게 보여줄 계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미 회사에서도 SNS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고용한 직원들의 사생활을 알기위해 SNS 만큼 좋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조지 오웰의 1984를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SNS는 빅 브라더의 21세기 버전이다. 우리는 다수의 익명에게 우리의 삶을 그대로 개방하고 있다. 거기에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는 인터넷에서 스스로 벌거벗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수의 친구들'을 가지고 있다는 일종의 '허세'가 그 원인이다. 한 사람의 이념이 어떤지를 알기위해 고문을 할 필요도 없다. 단순히 자신이 SNS에 쓴 글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말이 익명이지 최근의 스마트 폰들은 전부 위치 정보를 트위터나 페이스 북에 보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스마트 폰에는 그렇다, GPS가 달려있고, 내가 어디 갔는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조지 오웰은 위대한 예언가였다. 모든 것이 1984보다 더 훌륭하게 자신을 감시하게끔 만들어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의 발목에 강력한 족쇄를 채우고 있다. 마치 마약같다. 내 생활이 공개가 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SNS에서 벗어 날 수 없다. 현대인에게는 당연히 친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통'이 요즘 세상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고,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나를 드러내야 한다. 그러니 이 모든 것들, 익명성, 개방성 같은 것들은 결국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로 작용한다.

                                <사진 출처 : http://www.netcharles.com/>

그러는 필자도 트위터와 페이스 북에 의해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여러분들에게는 이 글의 가장 정확한 예가 바로 필자일 수도 있다. SNS의 단점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필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모순인 세상. 음모론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정부가 사람들을 감시하기에 가장 좋은 세상이 바로 지금이라고 주장 할 수도 있겠다. 누가 알겠는가? 정말로 그런 세상이 지금일지. 조지 오웰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트위터에 "그것보세요. 제 소설에 등장한 빅 브라더는 바로 여러분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 '빅 브라더'는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이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답답함 때문에 지하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시간의 압박으로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지하철에 익숙하지 않아 방향이 헷갈려서 역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한 분에게 방향을 여쭤보게 되었다. 그 분은 서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내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셨고, 나는 천천히 지하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아이폰으로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 되는데 굳이 왜 물어봤을까?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어떤 낯선 씁쓸함을 맛보았다. 아이폰으로 확인하면 될 걸 굳이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의 시간을 빼앗아 가며 물어보았다는 사실이 왠지 남한테 폐를 끼친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엔 하다못해 피처폰에도 지하철 노선도가 있는데 왜 굳이 나는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쳐가면서까지 길을 물어보았을까?

혹시 내게 어떤 습관 같은 것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스마트 폰이 대중화되어가면서 모든 것이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해졌다. 버스를 기다리며 담배를 빼어물고 불을 붙였다가 막 타려는 버스가 도착했을 때 아깝디 아까운 장초를 버려야 했던 시절은 지난 것이다. 어플리케이션 하나면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을 알 수 있다. 그 시간의 오차도 매우 적어서 때로는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집에서 불편하게 기차표를 예매해야 하는 일도 없어졌다. 그냥 버스를 타고 가면서 스마트 폰으로 예매를 하고, 서울역에 가서 '무인 승차권 발급기' 같은 기계로 내 정보만 입력하면 바로 표가 나온다. 어디 그 뿐인가? 영화가 보고 싶다면 '앱'으로 예매를 하고 역시 '발급기'로 발급받으면 끝이다. 동영상이 보고 싶어지면 인코딩 노가다를 할 필요도 없다. 밖에서 원격으로 컴퓨터를 켜고, 실시간 인코딩을 하면서 영화를 보여주는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하면 언제 어디서든 배터리가 허용하는 한도내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 편리함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편리함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종류의 건조함을 동반한다.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는 '끈끈한 감수성' 같은 것이 없는 것이다. 예컨대 기차표를 예매할 때, 사람들 틈에서 줄을 서고, 매표소에 있는 직원과 기차 시간을 '의논'하면서 표를 구매하는 일은 이제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집에 전화를 걸어서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컴퓨터좀 켜달라고 말 할 일도 없다. 자동 매표기가 있는데 굳이 매표소 직원과 없는 표좀 구해달라고, 다시 한 번 확인해 달라고 실랑이를 할 필요도 없다. '기계의 안내 문구 하나면 포기도 쉬워지는 세상'인 것이다.

낯선 사람과 페이스 투 페이스로 소통을 하는 시대는 이미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타인과 소통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들이 스마트 폰의 편리함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다. 버스 노선을 모를 때, 친절하게 어떤 버스를 타서 어디에서 갈아타고 어디서 내리면 된다는 식의 '기본적인 소통'은 한낱 '어플리케이션' 하나로 무너져 내린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소통, 즉 '소셜 네트워크'가 과연 이러한 '페이스 투 페이스' 식의 소통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트위터나 페이스 북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인가? 불특정 다수의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고 '인맥'을 쌓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국 숫자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상에서 나 홀로 절규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는가? 메신저 어플로 절친한 친구와 시도때도 없이 대화를 나누고, 영상통화로 서로의 얼굴을 본다고 한들, 결국 휴대폰의 배터리가 떨어져 나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꺼진 검정색 화면에서 보여지는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란 사람 대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 '디지털로 걸러지지 않는' 시선과 소리로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소통은 종말을 맞이한 것 같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는, 언젠가 내가 말했듯이 점점 더 '인간처럼' 변해가지만, 인간은 점점 더 '기계처럼'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소통은 프로그래밍으로 만들어진 '기계' 혹은 '디지털'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한 번씩 거쳐가는 것이다. 컴퓨터 대 컴퓨터, 스마트 폰과 스마트 폰의 대화. 우리가 흔히 '소통'이라 부르는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 방식의 대화는 컴퓨터나 스마트 폰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인간의 대화'가 아닌 '기계간의 대화'와 다를바 없다. 영화표나 기차표를 예매할 때, 우리는 편리함때문에 기계를 이용하는데, 그것은 곳 기계와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은 식이다.
아무리 기계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나오고, 아무리 인간이 조작하는 컴퓨터로 대화를 나눈다고 한들, '사람 대 사람'과의 대화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언젠가 '카카오톡'으로 프로젝트 회의 같은 것을 한다는 기사를 언젠가 봤을 때 나는 아연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얼굴이 시뻘개질 정도로 흥분하며 그 열기를 느끼면서 토론을 하는 모습도 이제 자취를 감추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는 나도 '컴퓨터'를 이용하여 이 글을 쓰고 있다. 이것이 곧 소통이라며. 그러나 가끔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남길 때면, 아까도 말했듯이, 아니 이건 '사람 대 사람'의 대화가 아니니까 '아까'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든 위로 올려 내가 한 말을 볼 수 있으니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허공에 대고 홀로 외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러자면 내 자신이 한없이 불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군가는 내 글을 읽고, 공감을 하고, 혹은 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는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소통은 종말을 고한것 같다. 1990년대, 내가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때, 처음 PC통신을 접했던 시절이 생각난다. 비록 그 때도 '디지털을 한 번 거쳐서' 대화를 나누었지만 왠지 그 시절에는 아날로그식의 감성 같은 것이 있었다. 모뎀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전화는 언제나 통화중이었다. 가끔씩 전화를 써야 할 때는 PC통신을 이용하지 못했다. 모니터가 꺼지고, 대화가 멈췄을 때의 여운을 다음 날 혜화동의 어떤 술집, 혹은 카페에서 풀었다. 공허함은 잠시였고,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아직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낡은 컴퓨터와 전화기에서 사람의 냄새가 났던 것도 같다. 진정한 '소셜 네트워크' 식의 소통은 어쩌면 그 시절이 정점이지 않았을까?


  1. 2011.03.01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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