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홀로 외롭게 앉아 위스키를 홀짝거리는 그녀를 본 당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가 있다. 그저 넋놓고 그녀를 바라보던가, 혹은 웨이터에게 메모지를 빌려 만년필을 꺼내 간단한 메모와 함께 11자리의 숫자를 적어 그녀에게 다음 잔의 위스키와 함께 보내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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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e Straits의 Your Latest Trick이 흘러나오는 어느 금요일 밤의 바(Bar). 담배연기가 자욱하고, 넥타이는 반쯤 풀어져 있으며,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 기분좋은 혼란 속에서 유난히 슬픈 표정을 지으며 홀로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세련된 여성을 당신이 발견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매너없이) 그녀 옆에 앉아 "무슨 일이라도?"라는 저렴한 멘트를 던질지도 모르겠다. 혹은, 웨이터에게 부탁해 그녀에게 술을 한 잔 살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고마운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면,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 번호를 따러 가겠지.


삼십 대, 혹은 사십 대. 상대방을 유혹할 때도 우아해져야 하는 나이. 언제나 이십 대 처럼 놀 수는 없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다면, 최대한 매너있게, 그리고 세련되게 접근해야 한다. 게다가 올드하게. 때로 우리는 올드해질 필요가 있다. 디지털은 '편리함'을 제공해주지만 반대로 '거부감'을 부록으로 함께 보내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아날로그의 표면은 단순하다. 그러나 내면은 복잡하다. 아날로그가 가진 감성은 일종의 '소통'과 연관이 있다. SNS가 보급화 되고, 누구나 스마트 폰으로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다시 생각해보면 여러분들이 디지털이라는 영악한 존재가 놓은 덫에 말려드는 것일 뿐이다. 트위터에서 내가 던진 한 마디에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을 때, 당신은 공허함을 느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날로그는 그렇지 않다. 실체가 없는 '누군가'와 소통하는 것과는 달리, 아날로그는 애초부터 '실체가 있는 누구'를 필요로 한다. 예컨대 우리가 펜으로 편지를 쓴다고 쳐보자. 편지를 받는 대상이 없다면 편지를 쓰는 행동 자체가 의미가 없다. 비닐 레코드(LP)를 구입하러 갔을 때, MP3를 집에서 편리하게 결제하는 대신에 우리는 레코드 점 주인장과 흥정을 하게 된다. 그러니 아날로그는 '소통'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다시 끈적거리는 첫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금요일 밤. 일주일의 스트레스. 한 잔의 술이 필요할 때 당신이 늘 찾던 단골 술집. 외롭고 슬퍼 보이는 낯선 여인. 그녀와 '소통'을 하고 싶다면 메모지(혹은 냅킨)에 정성스레 쓴 메모 한 장이 필요하다. 11자리의 전화번호를 적어두고 술집을 나가면 혹시라도 연락이 오지 않을까, 혹은 재떨이 위에 한 줌의 검은 재로 변해 있지 않을까 궁금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절대로 혼자 할 필요가 없다. 웨이터에게 조언을 구해봐야 성범죄자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만년필에게 조언을 구해보자. 품격 떨어지게 싸구려 펜으로 아무렇게나 쓴 메모를 보내는 것은 상대에게, 그리고 당신에게도 재앙으로 다가 올 것이다. 여자의 립스틱 처럼 진득한 잉크, 흐트러지지 않은 정갈한 필체, 담배 냄새와 술냄새 사이에서도 맡을 수 있을 정도의. 그 어떤 향수보다도 진한 잉크향.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홀로 슬퍼하는 여성을 매료시키기 위한 완벽한 아이템이다. 


설령 그녀가 당신을 퇴짜 놓는다 할지라도, 장담컨대 당신이 공들여 쓴 그 메모가 재떨이 위에 재로 변해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녀는 아마도 그 낯선 술집에서의 추억을 소중히 지갑 속에 넣어, 행운의 부적처럼 가지고 다닐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언젠가 연락을 해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만년필을 '길들인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없다. 만년필과 그 소유자는 '주종관계'에 놓여있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만년필을 처음 손에 넣고 해야 할 일은 그 만년필과 '소통'하는 일이지 '길들이는'일은 아니다. 진정 만년필과 소통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인셉션의 '토템'처럼 늘 가지고 다니던 만년필이 당신에게 가끔 행운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년필의 교감은 그래서 중요하다. 완전한 나의 삶으로, 낯선 타인을 불러오는 것과 비슷하다. 만년필을 처음 손에 넣고, 하얀 백지에 첫 잉크가 부드럽게 흘러나올 때의 기분은 흡사 '첫키스'와도 비슷하다. 그러니 만년필은 아마도 첫사랑과도 같을 것이다. 당연히 '만년필'이라는 친구가 '남성'이냐 '여성'이냐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바'에 홀로 외롭게 앉아있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의 만년필이 '여성'일리는 없다. 내가 외로울 때 내 감성을 달래주는 만년필은 당연히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여성의 품이리라. 만년필은 복잡한 존재다. 소유한다고 전부가 아닌, 교감과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방구에서 파는 싸구려 볼펜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셉션의 토템이야기가 나왔으니 생각해보자. 늘 지니고 다니던 행운의 만년필이 어느 날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만해도 잉크가 꽉 차 있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꿈인가 현실인가. 마음에 드는 상대가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멋진 문구도 떠올랐는데, 메모지는 딱 적당한 크기인데도 불구하고 만년필에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몽이니. 아마도 만년필에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대는 꿈 속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림보' 상태에 빠져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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