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무리하다'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모아서 정리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컴퓨터가 그리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 우리는 어떤 자료를 얻기 위해서는 책이나 신문을 뒤졌다. 그리고 그 자료를 보관하는 방법은 '갈무리', 즉 원하는 정보가 있는 잡지나 신문, 책을 구입하여 보관하던가, 혹은 그 중 원하는 부분만 오려서(때로는 과감하게 찢어서) 별도로 보관하기도 했다. 이렇게 정보들을 잔뜩 모아 놓은 두꺼운 자료집들은 자기만의 보물이었다. 책꽂이 가득 꼽혀 있는 자료집들은 때로는 누군가의 일생을 모아 놓은 총체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검색의 시대'가 찾아왔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검색해봐" 라는 말이 일상이 되었다. 과거에는 정보를 얻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두꺼운 책들을 몇 시간이고 뒤적여야 했다면, 지금은 초 단위로 정보를 검색해 낼 수 있다. 구글은 검색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라왔다. 그것은 아마 대부분의 포털 서비스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검색이란 이 시대의 기본으로 자리잡았다. 어느 웹사이트를 가도 검색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초창기 검색엔진은 검색 조건이 별도로 존재했다. 예를 들어 '영화'와 '배우'를 검색하려면 '영화 and 배우'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럴 필요 조차도 없어졌다. 어떤 방식을 이용해서 검색을 해도 결과는 나온다. 


  결과는 나온다. 인터넷에는 인터넷이 발달하기 이전의 자료들 조차도 준비되어 있다. 여러분들이 1930년대 동아일보를 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1930년대에 나와있는 동아일보를 볼 수 있다. 여러분들이 한겨레 창간호를 보고 싶다면, 간단하다. 검색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이 검색이 되는 편리한 세상이지만,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편리함만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자신의 이름이 인터넷에 검색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돈을 받고 인터넷에 떠 있는 자신의 정보를 대신 지워주는 업체까지 생겨나는 형편이다. 조지 오웰의 <1984> 이후, 사람들은 정말로 '감시당하는 세상'이 올까 의문을 가졌지만 실제로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검색은 곧 검열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우리는 <1984>의 바로 그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정보를 남겨야하고, 때로는 아주 손쉽게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접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어떤 면을 검색 몇 번으로 찾아 낼 수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SNS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낙관적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검열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제 영화에서는 누군가의 정보를 알기 위해 굳이 그 사람의 컴퓨터를 해킹하거나 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검색하기만 하면 끝이다. 검색의 시대. 우리는 검색을 하는 것인가, 검색을 당하는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iPhone 5s


* 사진을 무단으로 퍼갔을 경우, 법적인 조치를 받습니다.


SNS, 실체가 없는 공동체


부정해봐도 소용없다. 우리는 이제 SNS, 그러니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근본적으로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계정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런 서비스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연일 SNS와 관련된 뉴스를 내보내고 있다. 트위터를 쓰지 않는 사람들도, 트위터가 무슨 서비스인지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SNS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SNS가 무슨 대단한 기술을 요구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0과 1로 만들어진 어느 실체가 없는 세상에서 역시 '0과 1'로 만들어진 목소리를 뱉어내는 것이다. 내 목소리는 때로는 디지털 세계의 유령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와 '접속'하기도 한다. 가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SNS이다. 


SNS는 실체가 없는 공동체이다. 여기서 '실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뜻보다는 조금 더 내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내가 남긴 트윗을 'RT'를 한다. 누군가는 내 페이스 북의 글을 보고 '좋아요'를 눌러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군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왜 확신이 없느냐고 물을 수 있다. 내게 '좋아요'를 눌러준 사람은 내 친구이며, 오프라인에서도 자주 만나는 사람인데, 어째서 실체가 없다고 말하느냐고 따질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의 글에 '좋아요'를 눌러주고, 리트윗(RT)을 한 사람은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실체가 없는 사람들이다. 나또한 그렇다. 나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현실, 즉 '오프라인'에서는 실체가 존재하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그저 0과 1의 집합체일 뿐이다. 온라인 안에서는 누구나 0과 1로 존재한다. 이 두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존재들은 전 세계에 걸쳐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룬다. 그러나 실체는 없다. 내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러준 누군가를 나는 알고 있지만, 디지털 안에서 그, 혹은 나는 하나의 추상적은 숫자 조각들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는 디지털 고스트, 즉 전자 유령이나 다름없다. 


당신은 SNS 중독자입니까?


생각해 볼 문제이다. SNS를 하지 못하면, 마치 소외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현실, 그러니까 '오프라인'에서는 천대받고, 멸시받으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을 어떤 누군가는 사실 SNS에서는 스타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개의 세상을 오고가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는 디지털의 세상이고, 또 하나는 그 디지털의 세상을 가공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현실에서도 대부분의 시간들을 SNS를 하면서 소비한다. SNS는 정치적으로, 상업적으로, 그리고 개인의 억압된 욕망을 자위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그러니 SNS는 그 어느 기술보다도 더 빠르게 진보했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SNS에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쯤에서 나는 그대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은 그렇다면 SNS 중독자일까요?


SNS는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


왜냐하면 때로는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그러니까 명동 한 복판에서 "나는 삶이 정말 짜증난다."라고 외칠 수 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명동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들이고, 내가 만일 명동 한 복판에서 "나는 삶이 정말 짜증난다."고 외쳐봐야 위로는 고사하고 미쳤다고 생각하며 비웃음만 사게 될 것이다.

그러나 SNS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SNS에서는 내가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게 "나는 삶이 정말 짜증난다."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위로를 해줄 것이고, 누군가는 삶이 왜 짜증이 나는지 이유를 물어볼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당신(혹은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SNS에서 조차도 누구하나 내 목소리에 신경쓰지 않고 귀기울여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재앙이나 다름없다. 현실에서도, 그렇다고 가상세계인 디지털 내에서도 누구하나 내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슬픈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소외되고, 고독해져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삶에 SNS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가에게는 약이고, 누군가에게는 독이 된다. 누군가에게 SNS는 기회이며, 또 누군가에게 SNS는 절망일 것이다. 우리는 사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문명의 이기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의 소외감이나 절망, 고독함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만, 디지털 내에서 느끼는 이러한 감정들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더욱 더 고독하고, 절망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SNS의 시대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자명하다.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저 걸어온 대로, 다시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허공에 대고 외치는 메아리가 아닌, 나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 중심을 잃지 말라고. SNS는 그저 하나의 도구이며 수단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점점 곰팡이가 생긴 식빵처럼, 그렇게 SNS에 잠식당할지도 모른다. 

저기 홀로 외롭게 앉아 위스키를 홀짝거리는 그녀를 본 당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가 있다. 그저 넋놓고 그녀를 바라보던가, 혹은 웨이터에게 메모지를 빌려 만년필을 꺼내 간단한 메모와 함께 11자리의 숫자를 적어 그녀에게 다음 잔의 위스키와 함께 보내주던가.



iPhone 4S



Dire Straits의 Your Latest Trick이 흘러나오는 어느 금요일 밤의 바(Bar). 담배연기가 자욱하고, 넥타이는 반쯤 풀어져 있으며,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 기분좋은 혼란 속에서 유난히 슬픈 표정을 지으며 홀로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세련된 여성을 당신이 발견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매너없이) 그녀 옆에 앉아 "무슨 일이라도?"라는 저렴한 멘트를 던질지도 모르겠다. 혹은, 웨이터에게 부탁해 그녀에게 술을 한 잔 살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고마운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면,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 번호를 따러 가겠지.


삼십 대, 혹은 사십 대. 상대방을 유혹할 때도 우아해져야 하는 나이. 언제나 이십 대 처럼 놀 수는 없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다면, 최대한 매너있게, 그리고 세련되게 접근해야 한다. 게다가 올드하게. 때로 우리는 올드해질 필요가 있다. 디지털은 '편리함'을 제공해주지만 반대로 '거부감'을 부록으로 함께 보내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아날로그의 표면은 단순하다. 그러나 내면은 복잡하다. 아날로그가 가진 감성은 일종의 '소통'과 연관이 있다. SNS가 보급화 되고, 누구나 스마트 폰으로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다시 생각해보면 여러분들이 디지털이라는 영악한 존재가 놓은 덫에 말려드는 것일 뿐이다. 트위터에서 내가 던진 한 마디에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을 때, 당신은 공허함을 느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날로그는 그렇지 않다. 실체가 없는 '누군가'와 소통하는 것과는 달리, 아날로그는 애초부터 '실체가 있는 누구'를 필요로 한다. 예컨대 우리가 펜으로 편지를 쓴다고 쳐보자. 편지를 받는 대상이 없다면 편지를 쓰는 행동 자체가 의미가 없다. 비닐 레코드(LP)를 구입하러 갔을 때, MP3를 집에서 편리하게 결제하는 대신에 우리는 레코드 점 주인장과 흥정을 하게 된다. 그러니 아날로그는 '소통'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다시 끈적거리는 첫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금요일 밤. 일주일의 스트레스. 한 잔의 술이 필요할 때 당신이 늘 찾던 단골 술집. 외롭고 슬퍼 보이는 낯선 여인. 그녀와 '소통'을 하고 싶다면 메모지(혹은 냅킨)에 정성스레 쓴 메모 한 장이 필요하다. 11자리의 전화번호를 적어두고 술집을 나가면 혹시라도 연락이 오지 않을까, 혹은 재떨이 위에 한 줌의 검은 재로 변해 있지 않을까 궁금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절대로 혼자 할 필요가 없다. 웨이터에게 조언을 구해봐야 성범죄자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만년필에게 조언을 구해보자. 품격 떨어지게 싸구려 펜으로 아무렇게나 쓴 메모를 보내는 것은 상대에게, 그리고 당신에게도 재앙으로 다가 올 것이다. 여자의 립스틱 처럼 진득한 잉크, 흐트러지지 않은 정갈한 필체, 담배 냄새와 술냄새 사이에서도 맡을 수 있을 정도의. 그 어떤 향수보다도 진한 잉크향.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홀로 슬퍼하는 여성을 매료시키기 위한 완벽한 아이템이다. 


설령 그녀가 당신을 퇴짜 놓는다 할지라도, 장담컨대 당신이 공들여 쓴 그 메모가 재떨이 위에 재로 변해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녀는 아마도 그 낯선 술집에서의 추억을 소중히 지갑 속에 넣어, 행운의 부적처럼 가지고 다닐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언젠가 연락을 해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만년필을 '길들인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없다. 만년필과 그 소유자는 '주종관계'에 놓여있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만년필을 처음 손에 넣고 해야 할 일은 그 만년필과 '소통'하는 일이지 '길들이는'일은 아니다. 진정 만년필과 소통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인셉션의 '토템'처럼 늘 가지고 다니던 만년필이 당신에게 가끔 행운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년필의 교감은 그래서 중요하다. 완전한 나의 삶으로, 낯선 타인을 불러오는 것과 비슷하다. 만년필을 처음 손에 넣고, 하얀 백지에 첫 잉크가 부드럽게 흘러나올 때의 기분은 흡사 '첫키스'와도 비슷하다. 그러니 만년필은 아마도 첫사랑과도 같을 것이다. 당연히 '만년필'이라는 친구가 '남성'이냐 '여성'이냐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바'에 홀로 외롭게 앉아있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의 만년필이 '여성'일리는 없다. 내가 외로울 때 내 감성을 달래주는 만년필은 당연히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여성의 품이리라. 만년필은 복잡한 존재다. 소유한다고 전부가 아닌, 교감과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방구에서 파는 싸구려 볼펜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셉션의 토템이야기가 나왔으니 생각해보자. 늘 지니고 다니던 행운의 만년필이 어느 날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만해도 잉크가 꽉 차 있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꿈인가 현실인가. 마음에 드는 상대가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멋진 문구도 떠올랐는데, 메모지는 딱 적당한 크기인데도 불구하고 만년필에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몽이니. 아마도 만년필에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대는 꿈 속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림보' 상태에 빠져 있는지도.


 




Google+ 라는 것이 생겼다. 구글에서 제공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보면 된다. 페이스 북과 트위터를 견제하기 위한 서비스라는 것은, 위의 스크린 샷으로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구글은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 한 적이 있었다. 구글 웨이브, 버즈 같은 서비스 말이다. 그리고 이 서비스들을 국내에서 제대로 이용하는 유저들은 드물다. 그래서인지 구글은 지난 소셜 서비스를 개량/발전 시키는 대신,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었다. Google+ 가 그렇다. 뒤에 '프로젝트' 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구글 플러스에 로그인 한 화면이다. 구글의 문제는 바로 '초대장' 에 있다. 초대장이 없으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 만약에 구글이 이 서비스를 페이스 북 만큼이나 활성시키고자 했다면 초대장제도는 구글의 발목을 잡을 수 밖에 없다. 뭣하러 거추장스럽게 초대장을 얻으러 다녀야 하는가.

인터페이스는 페이스의 그것과 별다를 것이 없다. 서클이라는 서비스가 있지만 '즐겨찾는 친구'를 인터페이스만 바꿔 놓은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라이브 웹캠을 이용한 '수다방' 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실 대한민국에서 '라이브 웹캠'을 얼마나 이용하겠는가? 일단 대부분의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가 모바일로 넘어온 이상, 페이스 타임, 영상통화 같은 것들이 있기에 PC상으로는 큰 효용이 없어보인다. PC로 영상채팅을 하려면 이미 다른 편리한 서비스들도 많다. 이를테면 네이트 온이나 MSN 같은 것들도 영상채팅을 지원한다.

구글의 새로운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인 Google+는 '구글 이용자'들을 끌어들여 소셜 네트워크의 강자가 되겠다는 구글의 야망이 보이지만 현실의 장벽은 두껍기 짝이 없다. 일단 국내에서는 페이스 북이 선점하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 북이 국내에서 성공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김연아를 비롯한 유명 스타들이 이용을 했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만약에 Google+가 국내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영향력' 있는 스타들이 이용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페이스 북을 Google+가 이겨낼 방도는 없다. 그저 구글의 '실험적인'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중에 하나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또하나 난점은 위에도 언급했던 초대장 제도이다. 베타 서비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대장 제도는 사실 서비스 확산에 도움은 되지 못한다.

구글이 Google+ 를 성공시키려면, 적어도 국내에서 사용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현재로서는 획기적인 무엇인가는 찾기 힘들다. 단지 번거로운 인터페이스만 보일 뿐이다. 지적했던 단점들을 보완하지 못한다면, 구글 웨이브, 버즈와 같이 기억에서 잊혀져 갈 서비스 중에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 사실, 구글은 다양한 분야에 발을 뻗히고 있지만, 안드로이드와 지메일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크게 히트한 상품은 없다. 구글 맵 정도가 그 뒤를 따르고 있지만 이마저도 다음과 네이버하고 경쟁해야 한다. 새로운 실험정신은 좋지만, 국내 IT의 다양한 특수성을 감안해보건데, 정말로 획기적이거나, 수많은 스타들이 이용하지 않는 한,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 2011.07.14 00:10

    비밀댓글입니다

  2. 2011.07.14 00:10

    비밀댓글입니다

  3. 2011.07.14 00:10

    비밀댓글입니다

  4. 2011.07.14 00:11

    비밀댓글입니다

  5. 2011.07.14 06:17

    비밀댓글입니다

  6. 치노엄마 2011.07.15 10:48 신고

    크롬에서 이용하시되 관련 플러그인 몇개 더 깔고 사용해 보세요.
    UI가 엄청나게 편합니다.
    나머지도 몇가지 반론하고 싶지만 바빠서 이만...


국내 최초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라고 볼 수 있는 '싸이월드'를 기억해보자.
싸이월드는 '접대'로 대변되던 '인맥'관리에 있어서 새로운 개념을 선보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니홈피'에 생활을 공개하고 '친구'들과 그 생활을 공유하였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싸이월드는 생각보다 폐쇄적인 서비스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사생활을 공유하려면 '친구'로 등록되어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본 프로필 조차도 볼 수 없다. 싸이월드의 성공 이면에는 이러한 폐쇄성이 밑받침 되어 있었다. 한 개인의 사생활을 보기 위해 그와 친구추가를 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친목'의 정도가 결정된다. 그러니까 '아는사람들'끼리의 친목인 셈이다.

페이스 북이 어느날 혜성처럼 등장했다. 페이스 북은 싸이월드의 폐쇄성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접근했다. 친구추가의 과정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페이스 북의 친구추가는 훨씬 간단하다. 친구추가를 요청하면 거절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싸이월드가 아는 사람들 간의 친목의 공간, 즉 원래 있던 인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공간이라면 페이스 북은 새로운 인맥을 생산해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트위터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친구가 있을 수록 그 사람의 인기도가 결정된다. 게다가 싸이월드와는 달리 전 세계의 사람들, 인기스타들과도 친구를 맺을 수 있다. 그야말로 페이스 북은 개방화 소셜 네트워킹의 정점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개방화'가 역으로 족쇄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SNS 이용자들이 자신이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직장인들이 두 개 이상의 복수 트위터 계정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족쇄이론'을 뒷받침해준다. 복수의 트위터 계정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일상을 이야기하는 계정과 '직장상사'에게 보여줄 계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미 회사에서도 SNS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고용한 직원들의 사생활을 알기위해 SNS 만큼 좋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조지 오웰의 1984를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SNS는 빅 브라더의 21세기 버전이다. 우리는 다수의 익명에게 우리의 삶을 그대로 개방하고 있다. 거기에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는 인터넷에서 스스로 벌거벗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수의 친구들'을 가지고 있다는 일종의 '허세'가 그 원인이다. 한 사람의 이념이 어떤지를 알기위해 고문을 할 필요도 없다. 단순히 자신이 SNS에 쓴 글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말이 익명이지 최근의 스마트 폰들은 전부 위치 정보를 트위터나 페이스 북에 보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스마트 폰에는 그렇다, GPS가 달려있고, 내가 어디 갔는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조지 오웰은 위대한 예언가였다. 모든 것이 1984보다 더 훌륭하게 자신을 감시하게끔 만들어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의 발목에 강력한 족쇄를 채우고 있다. 마치 마약같다. 내 생활이 공개가 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SNS에서 벗어 날 수 없다. 현대인에게는 당연히 친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통'이 요즘 세상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고,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나를 드러내야 한다. 그러니 이 모든 것들, 익명성, 개방성 같은 것들은 결국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로 작용한다.

                                <사진 출처 : http://www.netcharles.com/>

그러는 필자도 트위터와 페이스 북에 의해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여러분들에게는 이 글의 가장 정확한 예가 바로 필자일 수도 있다. SNS의 단점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필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모순인 세상. 음모론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정부가 사람들을 감시하기에 가장 좋은 세상이 바로 지금이라고 주장 할 수도 있겠다. 누가 알겠는가? 정말로 그런 세상이 지금일지. 조지 오웰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트위터에 "그것보세요. 제 소설에 등장한 빅 브라더는 바로 여러분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 '빅 브라더'는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이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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