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hone 6s Plus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범인(凡人)들이다. 때문에 안식을 얻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처럼, 우리들도 우리에게 맞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늘 방황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명필이 아니기 때문이다.

 

  키보드를 구입했다. 무려 30만원 대의 키보드다. 키보드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회사도 아닌, 심지어 일본에서 프레스 기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나온 키보드다. 회사 이름은 '토프레'. 이들이 개발한 '무접점 방식'의 키보드는 기존의 기계식과는 가격을 비롯해 여러가지로 차별화를 두고 있다. 내가 구입한 키보드는 이 회사에서 만든 키보드 중, 가장 호불호가 갈린다는 '리얼포스 하이프로'라는 제품이다. 키캡에는 홈이 파여있어서 기존의 키보드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한때 잉베이 맘스틴의 팬더 스트라토캐스터 기타가 유행을 탔던 적이 있었다. 90년대 이야기다. 당시 잉베이 맘스틴의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기타는 지판이 움푹 파여있었다. 국내 기타업체인 콜트에서도 비슷한 기타를 생산한 적이 있었다. 지판이 움푹 파여있으면 속주에 유리하다는 말을 그 무렵 본 것 같아 나도 콜트에서 나온 바로 그 기타를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마찬가지로 이 키보드 역시 키캡이 움푹 파여있는 것이다. 아마도 '속타'를 위해서 그렇게 만든 모양이다. 짐작컨대 이 키캡을 디자인한 디자이너는 과거 잉베이 맘스틴의 팬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상상이다.

 

  이 키보드는 어디를 봐도 불친절하다. 우선 ESC 키를 비롯한 상단의 펑션키들이 숫자키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ESC나 펑션키를 쓸 때면 필연적으로 숫자키를 손가락이 넘어가야 한다. 마치 고갯길을 넘는 기분이다. 디자인은 투박하기 그지 없어서 80년대 후반 컴퓨터를 구입하면 번들로 끼워주던 키보드를 연상시킨다. 살짝 태닝을 한듯, 아이보리색을 가지고 있다. 회색의 투톤은 좋게 말하면 레트로 디자인이고, 나쁘게 말하면 구리다. 다른 키보드에 있는 F키와 J키에 있는 돌기도 없다. 대신 다른 키보들에 비해 조금 더 움푹 파여 있다.

 

  키감도 고르지 못하다. ESC를 비롯한 윗줄의 키감과 방향키, 키패드의 키감이 전부 다르다. 심지어는 한글이 새겨진 자판의 키감도 조금씩 틀리다. 45g 균등이지만, 키압이 그렇다고 낮지도 않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키보드는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은, 누가보면 돈이 아깝다고 생각할 키보드일 수도 있다. 차라리 내가 가지고 있는 레오폴드의 FC660C 키보드의 키감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 둘다 같은 '무접점 방식'인데, 차이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키보드가 갖는 매력은, 위에 언급한 단점들을 충분히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무엇보다도 키감이 매력적이다. 기존 토프레의 리얼포스 키감은 흔히들 이야기하는 '초컬릿 부러뜨리는' 느낌을 준다. 키를 타이핑 할 때 마다 초컬릿을 톡하고 부러뜨리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프로는 그와는 좀 다르다. 쫀득쫀득하다는 표현도 틀리다. 하이프로만의 정체성을 가진 키감이랄까.

 

  움푹 파인 독특한 키캡도 익숙해지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움푹 패인 키캡이 손가락을 감싸는 느낌이다. 물론 내 손가락이 작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손가락이 두꺼운 분들이라면, 오히려 움푹 파인 키캡의 튀어나온 가장자리 부분 때문에 난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타이핑을 할 때 편안함을 느낀다.

 

  둥글둥글한 키캡은 리얼포스의 레트로한 디자인을 완성시키는 포인트다. 기존의 각진 키캡이 아닌,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한 키캡은 보기에도 편안해 보인다. 하이프로 키보드를 보다가 다른 키보드를 보면, 오히려 다른 키보드의 디자인이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공격적인 디자인처럼 보인다. 모서리가 둥근 이 키캡은 하이프로의 디자인을 좀 더 레트로하게 보이게끔 만든다. 일견 타자기를 연상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 키보드의 가장 큰 장점이라하면 그 독특한 키감에서 나오는 독특한 타이핑 소리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이 키보드를 고민도 하지 않고 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키보드는 각각의 키 위치들에 따라 다른 소리들이 나는데, 전체적으로 타이핑을 했을 때 나는 소리는 기계식이 만들어 내는 인위적인 '찰칵' 소리와는 다르다. 키캡이 철로 된 보강판을 두들기는 소리처럼 느껴지는데, 자칫 날카롭고 건조할 수 있는 소리가 내부에 들어 있는 러버돔으로 인해 어느 정도 중화가 된다. 소음은 적지 않은 편이지만, 그 소리가 시끄럽거나 거슬리지는 않는다. 기계식 키보드는 자신이 기계식 키보드라는 것을 강하게 어필하는 타이핑음을 만들어내지만, 하이프로는 소리 그 자체에 정체성이 담겨 있어서, 누가 들어도 "음, 이건 하이프로 키보드군" 이라고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자연스러운 타이핑 소리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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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들에게 키보드는 중요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컴퓨터로 글을 쓰는 작가라면 적어도 '자신만의 키보드'를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키보드는 내 손과 어울려야 하고, 내가 듣기에 편안한 타이핑 소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내 경우는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일종의 자극제가 되어 오히려 일을 하는데 더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니 키보드를 주로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키보드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리얼포스의 하이프로는 키보드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타건을 해 볼 가치가 있는 키보드라고 생각한다. 특히 장문의 글을 써야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무접점' 방식은 축복과도 같다.

 

  나는 현재 두 대의 무접점 키보드(하이프로, FC660C), 그리고 흑축 키보드 한 개(FC750R), 그리고 갈축 키보드(볼텍스)와 적축 키보드(볼텍스)를 각각 한 개씩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기계식 키보드는 적축이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그보다는 리얼포스의 하이프로가 장시간 타이핑하기에는 훨씬 편안하다. 키압은 물론 적축보다는 무겁지만, 전체적인 만듦새 자체가 타이핑에 최적화 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가격은 무척 비싼편이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는 키보드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러버돔이 굳어 버리며, 간혹 보강판에 녹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들을 감수하고 마치 야생마를 조련시키듯, 적응만 잘 된다면, 리얼포스의 하이프로는 그야말로 '인생키보드'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1. Favicon of http://simglorious.tistory.com BlogIcon 도플파란 2016.11.15 18:34 신고

    저도 하나쯤.... 갖고 싶은 최종 키보드 중에 하나네요...ㅎㅎ 가장 갖고 싶은 녀석은 해피해킹 녀석이긴 합니다...ㅎㅎ

    • Favicon of http://heejune.net BlogIcon Heejune 2016.11.16 16:10 신고

      저도 해피해킹이 탐나긴 했으나 제 전공에 방향키가 없는 건 힘들어서요. ^^
      대신에 fc660c가 있어서 괜찮습니다. ^^

  2. Favicon of http://talkingof.tistory.com BlogIcon 사진의미학 2017.03.11 20:39 신고

    리얼이....
    키보드 키캡이 뭔가 빈티지 한 느낌이 나네요 ㅎ

  3. KAraso 2017.08.06 11:31 신고

    안녕하세요. 뜬금없이 굉장히 죄송합니다만 혹 리얼포스 해당모델을 아직 가지고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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